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양의학/역사 및 서적 (문단 편집) === [[일본]] === [[일본]]의 고대 한의학은 7세기부터 9세기 사이 [[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들이 한반도를 경유하여 중국대륙에서 전수받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5세기 초에 [[한반도]]에서 의사가 온 기록이 있으나, 일본의 한의학 보급에 실질적으로 관여한 부분은 없다. 또 대륙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와 그걸 기록한 서적이 원활하게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한나라]] 시대의 [[상한론]]을 기초로 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타게된다. 본격적으로 일본의 한의학이 발전한 건 16~17세기 이후로, [[명나라]] 유학파인 의사 타시로 산키(田代 三喜)와 제자 마나세 도산(曲直瀬 道三)이 금원의학(金元医学)을 보급하면서 의학과 종교의 분리가 이루어진 뒤부터이다. 이시기의 의학을 '후세파'라고 부른다. 한편 [[상한론]]을 중시하던 '고방파' 측에서는 [[오행|음양오행론]]같이 실증성이 부족한 추상적인 개념을 들고 온 후세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또 외부 세력, 즉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서양 의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같은 16세기에 초기 서양식 병원이 설립될 정도였다.[* 다만 이 시기엔 서양도 근대적인 [[해부학]], [[생리학]]과는 거리가 먼 [[4체액설]]을 따르는 갈레노스의 의학을 기초로 하였다.] 18세기의 요시마스 도도(吉益東洞)는 그러한 [[일본]]의 한의학 역사에서도 큰 획을 그은 사람으로, 상한론 연구의 대가였으며 이후에 그 아들이 일본의 독자적 이론인 기혈수 이론 등을 수립하였다. 그 외에 18세기에는 서방의학의 영향을 받아 [[해부학]], [[마취|마취학]] 등이 발달하고 있었다. [[사형수]]를 해부한 장지는 다소의 오류는 있으나 옛 해부 이론의 오류를 지적한 '해부서'로 꼽힌다. 거기에 [[일본]]에는 [[네덜란드]] 해부학 [[서적]]을 [[번역]]한 [[해체신서]]도 있었다. 동시대 인접국가의 경우 [[청나라]] 왕청임이 쓴 의림개착이 거의 유일한 해부서이고, [[조선]]은 없었다. 실제로 한의학에서 사용되던 그림 등은 '해부도'가 아니라 장부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그림으로 설명한 개념도에 가까우며, 실제 기능도 이러했다. 하지만 '해부학'이라는 의학의 한 부분을 그저 어리석은 사람들의 삽질로 치부하고 아예 무시하였다. [[조선통신사]]가 방문할 때 일본의 의가 중 하나였던 기타야마쇼우와 조선의 의사였던 남두민의 대화는 양국의 의학 발전에 있어서 후대, 특히 한의대생들로 하여금 어이가 없어할 정도로 인식과 개방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시였다. 대화는 다음과 같다. 기타야마 쇼우가 "우리나라 어떤 의원이 죽은 사람의 배를 갈라 장기 등을 자세히 살피니 옛 그림과 다른 부분이 많더라. 이를 교정하고 [[책]]도 지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고 하자 남두민은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라”고 꾸짖듯 대답한다. [[일본]]의 전통적인 한의학의 경우 고대부터 [[상한론]]을 금과옥조로 떠받든다는 잘못된 사실이 퍼져있다. 사실 [[17세기]]경에 [[화란]] 의학이 전래된 이후로, 그 이전까지의 내경의학과는 별도로 상한학파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요시마스 도도와 같은 경우에는 우리나라의 [[이제마]]와 같은 독특한 이론을 설파한 존재로 여겨진다. 실제로 상한학파가 융성하였다 하더라도 일본 한의학에서도 3체질론이나 기타 내경계열 의학자들은 계속 있어 왔으니 이는 사실무근이다. 일본 내 시판중인 [[한약]]제제의 원전은 만병회춘 등의 명대 의서인 경우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